'상해임정' 102주년...좌-우 대립의 정치, 계승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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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정' 102주년...좌-우 대립의 정치, 계승 실패
  • 원종성 기자
  • 승인 2021.04.13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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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이후 블라디보스톡-상해-한성 등 동시다발 임시정부 수립, 9월 6일 하나의 정부로 통합...근거지는 상해로 합의, 이승만 집정관 총재-이동휘 국무총리 추대...1945년 혼란속에 막 내려
사진=네이버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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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n시사경제]원종성 기자

11일 오전 서울시 용산구 백범 김구 기념관 야외광장에서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과 황기철 보훈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102주년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이 펼쳐졌다. 전국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중소규모로 진행되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 4월 11일 일본통제에 저항하기 위해 상해에서 임시로 조직된 정부이다. 임시의정원 이동녕 의장을 비롯해 이승만-안창호-김구-신규식 등이 주도했다.

임시정부 수립은 상해에 앞서 블라디보스톡에서 시작되었으며 법통은 한성임정을 이어받고 항일운동의 근거지는 상해에 두기로 합의했다.

4월 23일 서울 봉춘관에서 13도 대표에 의한 국민대회를 열고 임시정부를 선포한다. 이어 같은 해 9월 6일 하나의 정부로 통합된다. 여기서 이승만은 집정관 총재, 이동휘는 국무총리로 추대된다. 임시정부의 특징은 공화제이다. 

임시정부 수립이 예고된 시점은 1917년이다. 신규식, 신채호, 박은식, 박용만 등 14인이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대내외적으로 관심이 집중되었다. 1910년에 잃은 국권을 되찾자는 지역별 독립운동 수준에서 전체의 의사를 결집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제안이었다.

1917년은 레닌의 볼세비키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한 격변의 시기였으며 러시아 10월혁명 후 1919년 통합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추대되는 이동휘를 비롯해 박애, 박진순 등이 최초의 사회주의 독립운동 단체 한인사회당을 결성한다. 이동휘는 독립을 위해 사회당을 세우고 무장투쟁의 선봉장이 된다.

1920년 이승만과 이동휘를 필두로 내분과 스캔들 등이 격화되며 공중분해 위기까지 겪게된다. 그 시기 만주에서는 홍범도-김좌진 장군 등이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연이어 격파한다.

임정에 정치적 좌-우 이념대립과 소수 지도자의 독선이 반복되는 사이 독립운동 현장에서는 수많은 의열사들의 희생이 이어지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직후 남한에는 건국준비위원회, 북한에는 인민공화국이 결성, 국내혼란과 미국의 임시정부 불인정으로 임정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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