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이력서 18회 "선조냐, 고종이냐?"

2025-01-02     이점석 기자

[nbn시사경제] 이점석 기자

4월 23일. 일요일. 오랜만에 가족나들이 겸 창경원을 찾았다. 부인 영수가 정성껏 김밥을 싸고 세 아이들을 데리고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이른 시간인 데도 불구하고 만개한 벚꽃 사이로 수많은 인파가 넘쳐났다. 혁명에만 오로지 정신을 쏟다 보니 정신적으로 너무 힘이 들고 가족에 대해서도 너무 소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고 싶은 마음에 공원을 찾았는데 오히려 인파에 치이는 느낌이다. 항상 호젓함을 즐기던 나는 이런 분위기가 별로 달갑지 않다. 하지만 아이들과 가족을 위해 꽃도 보고, 동물원 구경도 함께 했다. 놀이시설 회전목마를 타려고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고 줄이 길어 포기한다.

한쪽 구석에서 작은 공간을 찾아 판초를 깔고 모여 앉아 김밥을 먹었다. 이런 것이 가족 행복이런가 싶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또 부인 영수의 환한 웃음을 보면서 나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따사로운 봄볕이 가족들 얼굴에 가득 들어차고 있었다. 지나가는 아이스께끼 소년을 붙들어 께끼 하나씩을 사서 입에 물었다. 인산인해 인파로 인해 편안하게 오래 있기가 어려웠다. 해가 머리 위로 높이 솟은 것을 느끼며 창경원 문을 나서는데 문득 높다란 홍화문(弘化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전에는 국왕이 살던 창경궁이었는데 지금은 동물원. 식물원, 놀이터로 변해 있다. 좋게 보면 국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된 셈인데, 어째 씁쓸하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기 처분된 궁궐이기 때문이다. 문 앞으로 전차가 지나친다. 멀찍이 대기하고 있는 찝차까지 걸어가서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오니 문 앞에 강상욱, 길재호, 김형욱, 옥재호, 신윤창 중령, 박종규 소령 등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오후 2시에 육본 작전팀과 회의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4.19가 별탈 없이 무사히 지난 뒤 첫 모임이다. 지난 달 말에 대구로 내려왔던 박종규 소령을 통해 4.19 학생 데모 관련된 일을 전해 들은 뒤에 처음 만나는 셈이다. 손님들을 마루로 올라오라 하여 둘러 앉았다. 부인이 간단한 유과 접시와 함께 따뜻한 커피 한 잔씩을 내왔다. “내 깜빡할 뻔했네. 창경원 벚꽃 구경하느라고. 오랜만에 가족 봉사 좀 제대로 했나 싶어요. 회의 시간에 늦지 않아 천만 다행입니다. 하여튼 오시느라고 수고들 했습니다.”     

“각하, 예상했던 대로 4.19가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비둘기 작전은 애초부터 실현 가능한 안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 증명된 셈입니다. 각하의 예상이 적중했습니다.”길 중령이 상황 보고를 한다. 정부가 4월 위기설과 함께 총력 대응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지난 해처럼 3.15 부정 선거라는 잇슈가 없고, 또 경찰 발포로 인한 사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칫 큰 웃음거리가 될 뻔했던 4.19 이용 계획이었다. “예상했던 대로일세.”“오늘 주제는 혁명 당일 요인 체포, 구금에 대한 건입니다. 대통령과 총리, 참의원과 민의원 의장 및 주요 위원장, 정부 부처 장관, 육군 내 극렬 반혁명 지휘관들이 대상입니다.” 강상욱 중령이다. “영관급 장교 2인 1조로 구성하여, 공수단 병력 5명씩을 지원받아 행동합니다. 지난 4월 초에 체포 대상자를 배분했습니다.

각기 정보 수집과 행동 계획을 수립하고 은밀하게 시현 중에 있습니다.”“장면 총리 담당이 누구죠?”“접니다.” 박종규 소령이 손을 들고 나선다. “이번 혁명은 박 소령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거요. 절대 착오가 생겨서는 안돼.”“알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해내겠습니다.”“우리가 무혈 혁명을 해내느냐 여부는 장면 총리 체포 여부에 달렸어요. 자칫 실패한다면 반혁명군이 등장할 수 있고, 피를 볼 지도 몰라요.”냉철하고 치밀한 박 소령을 믿어야 한다. 그는 사격을 잘한다. 그에 걸맞게 목표를 정하고 반드시 ‘명중’시킬 수 있는 집중력의 소유자다. 해병대 병력과 포병단 병력이 내무부와 경찰국, 육군 본부를 엄습하는 것과 동시에 군통수권자인 총리와 대통령, 정부 각 부처 장관을 체포하는 일이 혁명의 일 단계 작전이고, 이것이 성공의 열쇠다.

“장면 총리 체포가 중요한 것은 모두가 잘 알 것이요. 그의 입을 통해 ‘혁명을 지지한다’는 메시지가 발표되면 그것으로 우리의 첫 목표는 달성한 셈이야. 아울러 윤보선 대통령 구금도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네. 군 통수권을 확보하고 나면, 그 다음 단계가 바로 행정권이야. 국회는 모여서 회의를 할 수 없게만 해도 일단은 성공한 셈이지. 혹시 조선 국왕인 선조와 고종의 차이점을 아시는가?”         모두가 어리둥절하기에, 간략하게 역사 이야기를 시작했다.1592년 풍신수길(豊臣秀吉)은 조선을 ‘먹기 위해’ 연인원 20만명에 이르는 정예병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군 대장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가등청정(加藤清正)이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하여 전쟁 준비가 부실했던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군대를 가볍게 대파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충주를 거쳐 5월 2일, 한성 서울을 점령했다. 불과 18일만에 서울을 차지했다. 풍신수길은 일본 막부 내정을 엿보기 위해 파견된 조선 사신들에게 ‘명년(明年)에 명(明)을 치러갈 테니 길을 빌려 달라(征明假道)’는 말을 공공연하게 했다. 그러나 정사 황윤길이 침략 가능성을 주장한데 비해서 부사 김성일은 공연한 민심 동요 유발이라며 반대 의견을 냈다. 문제는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동인(東人) 붕당의 김성일 의견이 먹혀 일본군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냈다는 점이다. 막상 침략을 받고 나니, 동인 집권 세력은 기겁을 하고 부랴부랴 대응책을 강구하고자 했다.

오판의 원흉 김성일은 의병을 거느리고 전선에 나선다고 어수선을 떨었지만 나라는 거의 멸망 단계까지 이르렀다. 당시 동인 세력이었던 이산해, 유성룡, 이순신, 권율 등은 뒤늦게 대응에 나서야했다. 장황하게 임진왜란 얘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후손들은 모두 유성룡, 권율, 이순신 만을 영웅시 한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선조(宣祖)다. 역사가들이 전쟁 영웅을 떠 받들다 보니 정작 노련한 정치가였던 선조의 통치력을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조선이 망하지 않은 것은 선조가 일본군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서행장은 가장 빠른 속도로 한성에 진주하여 선조를 사로잡고자 했다. 하지만 선조는 빠르게 판단하여 도피를 했고,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괴로운 몽진(蒙塵)을 했다. 만일을 위해 자신이 죽거나 잡힐 경우를 생각해 세자인 광해군을 후임 국왕으로 낙점을 해 놓았다.

일본군은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또 함경도로 춥고 높은 산악 지대를 헤매야 했다. 그 기간에 전열을 정비한 권율과 이순신, 원균, 조헌 등 관군이 동원되고,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을 거의 전멸시키기에 이르렀다. 충성심이 강한 유교 국가인 조선은 국왕만 포획하면 모든 일이 끝난다. 선조가 사로잡혀 교지를 내리면 권율, 이순신, 원균은 그 즉시 일본군 앞으로 포박을 받고 끌려와야 했다. 선조가 건재 함으로서 관군과 의병이 힘을 발휘할 수 있었고 마침내 일본군을 패퇴시킬 수 있었다.1636년 12월 28일, 임진왜란의 전례를 알고 있던 청(靑) 태종 황태극(皇太極)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명장인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이 지키던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곧바로 한성으로 치달렸다. 12만 청군은 1월 9일 개성을 통과했다.

기겁을 한 국왕(인조)은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다음날 긴급하게 남한산성으로 대피했다.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고립시킨 뒤 압록강을 넘은 지 불과 한달 만인 1월 28일, 인조의 항복을 받아냈다. 인조를 사로잡음으로써 전쟁은 그 즉시 끝이 났다.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자군과 수십만명의 백성이 포로가 되어 만주로 끌려 갔다. 최고의 장수 임경업은 인조의 명에 의해 곧바로 잡아들여져 사형을 당해야 했다. 조선의 경우에 국왕이 사로잡히면 그 즉시 전쟁이 끝나고 국가가 패망하는 지경에 이르르게 되어 있었다. 1880년대 월남의 완(阮) 왕조도 형제들 사이에 권력 투쟁을 하다가 멸망했다. 그 당시에 프랑스 선교사들은 국왕과 반란 세력 사이의 반목을 교묘하게 이용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국왕을 포획하여 통치권을 장악했다. 그렇게 멸망한 월남은 언어와 문화 모두를 잃고 최근에 와서야 제국 프랑스와 처절한 전쟁을 통해서 반쪽짜리 독립을 성취할 수 있었다. 국왕의 포획을 통해 프랑스는 순조롭게 식민지를 만들었다.   

19세기 말, 조선은 또 다시 일제의 먹잇감이 되어 있었다. 군부통치의 막부 시대를 끝내고 신흥 관료들을 내세워 급격히 세계 열강으로 등장한 일제는 류구(琉球,1879년), 대만(臺灣, 1895년)을 차례로 점령하여 복속시킨 뒤 마침내 조선을 집어 삼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류구는 국왕이었던 상태왕(尙泰王)이 일제에 의해 포섭되어 번왕으로 되면서 멸망의 길을 걸었다. 대만은 동학란 이후 진행된 청일전쟁에서 일제가 승리하면서 시모노세끼 조약과 함께 멸망하였다. 일제 침략의 중심에 있던 이등박문은 조선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임진왜란의 실패를 잘 알고 있던 그는 풍신수길처럼 대규모의 정예군대를 파견하는 침략 전쟁을 시도하지 않았다.

친절한 일본인을 가장하여 젊은 개화파 인사들을 친구로 만들고, 대원군과 고종/민비의 틈새를 파고들어 이쪽저쪽에 모두 인심을 쓰는 방법을 시도했다. 인심을 잃고 있던 양반 권력층을 대상으로 뇌물을 쓰고 헌병들을 이용하여 은근히 세를 과시했다. ‘잘난 체 하는’ 개화파들에게 야금야금 돈과 특혜, 정보를 제공하여 일본화한 뒤 ‘일본화가 곧 개화’인 것처럼 여기게 만들었다.이등박문은 고종을 포섭하여 꼼짝 못하게 하고는 강제로 합방 조약에 서명하도록 만들었다. 일제는, 이등박문은 엄청난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 편안하게 조선을 먹어 삼켰다. 고종은 몇 백 년 전 할아버지 선조에 비해 형편없는 존재였다. 우리 한국민이 아무리 자존심을 내세워보려고 하지만 고종을 생각하면 ‘답답’ 그 자체다. 이게 망하는 나라의 군주요 통치자다.조선의 아픈 역사를 들먹이는 이유가 있다.

내가 추진하는 5월 혁명이 무혈 혁명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윤보선과 장면을 고종처럼 다루는 방법밖에 없어 보인다.  마루에 둘러 앉은 모두가 ‘알아들었다’는 듯한 표정이다.   저녁을 먹고 가라면서, 부인이 잔치국수를 말아 내왔다. 30 초 중반의 젊은 군인들의 먹성이 대단했다. 순식간에 두 그릇 씩을 먹어 치웠다. 우리집 며칠 치 식량이 거덜나는 듯 했다. 어쨌든 가슴 뿌듯한 일요일 오후가 흘러 가고 있었다.   헤어지기 직전에 박 소령이 다시 입을 연다.“각하, 총리 체포조는 다른 조에 비해 두세배는 많은 인원을 주셔야겠습니다. 5명으로는 절대 부족합니다. 경호원들이 있어서 적어도 2개 분대는 있어야 합니다.

반도호텔 정문과 후문, 엘리베이터, 집무실 앞 등 많은 인원이 필요합니다.”“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5명으로는 부족하지. 작전팀에게 요청해요. 다시 당부하지만 박 소령 임무가 참으로 중요해. 절대 실패하면 안돼. 알았지?”“예 ! 알겠습니다. 충성.”“참, 각하. 총리 체포조는 일반 병사들보다는 위관급 장교들을 동원하려고 합니다. 박 소령 주도로 하되 공수단의 차지철 대위와 같은 위관급 장교 5-6명을 투입할 겁니다. 각기 2-3명의 부하 병사를 대동합니다.”치밀한 작전 참모 김형욱 중령이다.“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합시다.”그들의 등을 두드려 격려를 했다.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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