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혁명] 현대의학은 정말 과학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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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혁명] 현대의학은 정말 과학적일까?
  • 조한경
  • 승인 2024.05.08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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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로 전락한 과학

[nbn시사경제] 조한경(Joshua Cho, DC) 기능의학전문의

조한경 기능의학전문의
조한경 기능의학전문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대 의학을 신뢰하는 이유는 ‘과학적’이기 때문이다. ‘침대도 과학’이라는 광고를 듣고 자라온 탓에, ‘과학이 미래’라는 구호도 거부감 없이 와닿는다. 그만큼 ‘과학적’이라는 단어는 마법의 주문처럼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고 지적 권위를 높여준다. 현대를 사는 이들의 머릿속에는 과학은 늘 옳다는 등식이 자리 잡고 있다. 절대적 선이며, 참으로 받아들인다.
정말 그럴까? 두 가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정말 과학은 신뢰할 만한가?’
‘과연 현대 의학은 과학적일까?’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었던 인류가 과학 발전 덕분에 지구가 태양을 공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천둥 번개를 보고 신의 노여움을 두려워했던 인간이 위성사진을 보며 일기예보 관측을 하게 되었으니 과학을 믿는 것은 이성적인 현대인의 표상이 되었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 같은 시대적 화두를 통해서도 비이성과 이성으로 진영이 갈리고, 스스로 이성적이고 싶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과학의 편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과학을 새로운 신으로 받아들였다.

현대인들은 과학이라면 비판 없이 수용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고는 신을 믿는 것보다 더 큰 믿음으로 과학의 권위 앞에 복종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인간이 만들어낸 통계적, 확률적, 수학적 모델에 불과하다. 과학은 도구일 뿐이다. 과학은 진리가 아니다. 계속 변하는 것이 과학의 본질이다. 도구이기 때문에 사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진실을 은폐시키기에 좋은 도구가 아닐 수 없다. 진실을 없애기도 하고 진실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귀로 들은 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그렇다. 좀 더 파보고 스스로 알아보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과학은 우리를 배신하고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다. 수도 없이 그래왔다. 과학이 그런 것이 아니라 과학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늘 있어왔던 것이다. 과학이 절대가치를 갖게 된 현대 사회, 특히 서구 중심의 사회 모델에서 과학은 정보를 왜곡하고 사람들을 기만하는 데 쓰이는 도구로 전락했다.

한국과 같이 공교육을 통해 오랜 세월 동안 획일화된 사고를 주입받은 사회에서는 과학이 종교적 위치에 올라가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신을 대적하는 사람도 과학이라면 쉽게 믿는 경우가 많다. 믿고 의지하면 그것은 종교일 뿐 과학이 아니다. 합리적인 의심을 던지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이 과학이다.

과학을 지지하는 이들에게는 과학이 종교이기 때문에 과학이 말하는 것에 의심을 품거나 질문하는 태도에 크게 분노한다. 분통을 터뜨린다. 갈릴레이 시절에 종교 지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정작 ‘과학 정신’에는 위배되는 것이다. 종교, 도그마, 파시즘 같은 단어가 훨씬 더 잘 어울린다.
미국의 급진적인 역사학자인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이런 말을 했다. 

출처=펙셀스
출처=펙셀스

 

“역사상 가장 처참했던 전쟁, 학살, 노예 제도는 불복종이 아니라 복종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의료계 안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복종이라는 코드가 자리 잡고 있다. 의사 개인은 학회의 권위 앞에 복종한다. 제약 회사 주도의 연구 논문에 복종한다. 보건 당국의 권위에 복종한다. 병원과 제약 회사와 보건 당국이 말하는 것은 늘 과학적이고 검증되었으며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항암 치료에 문제가 있어도 의사 개인이 틀렸다고 나서지 못한다. 하나의 치료에 불과할 뿐인데도 그것을 비판하거나 의심하는 일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다.

백신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집단면역을 위협하는 돌팔이로 몰린다. 백신도 의약품인데 왜 문제가 없겠는가? 하지만 그런 지적은 허락되지 않는다. 정부 정책에 반하거나 복지를 거론하면 안보를 위협하는 빨갱이로 몰리는 것처럼 매카시즘과 비슷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한낱 의약품, 즉 상품에 불과한 항암제나 백신이 함부로 비판해서도, 없어서도 안 되는 신의 자리에 올라 있다.

그러니 의사 개인이 ‘과학적’ 검증을 마쳤다고 하는 주류 의학계의 시각에 반하는 의견이나 의심을 내는 순간 곧바로 ‘비과학적’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비주류’로 분리수거된다. 의학계 안에서 조롱당하고 인격 살인이 저질러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그것을 감내할 만한 동기도 없고(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럴 만한 지적 용기도 부족하다. 시키는 대로 말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하라면 공부만 하던, 순응하는 성향들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현대 의학이 과학에 기반을 둔다는 의미는 인류가 갖고 있는 최고의 지적, 물질적 자원을 동원해 사회현상 혹은 자연현상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뜻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완벽을 바랄 수는 없다. 아직도 과학자들은 대부분의 자연현상들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 이해할 수 없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끊임없는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다. 우주의 기원도 모르고 생명의 기원도 모른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열심히 연구하며 알아가고 있는 중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과학은 수많은 실패와 오류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니 과학적이라고 큰소리칠 일이 아니다. 과학적이니 겸손해야 할 일밖에 없다. 이처럼 과학은 한계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연구에 몰두하며 인류의 지적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학자들의 노고에 누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 지나치게 의존적이거나 맹종하는 태도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뿐이다. 

사람을 섬기는 과학 vs 기업을 섬기는 과학

일본 후쿠시마에 가서 세슘이나 방사선 이야기를 하면 그곳 주민들로부터 돌아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어쩌라고!”
맞는 말이다. 해답도 주지 못하면서 문제만 제기하면 듣는 사람은 짜증 나기 마련이다. 지금의 사회가 그렇다. 건강 이야기를 할 때 돌아오는 냉담한 반응. “어쩌라고!” 해답 없는 문제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환경호르몬을 피해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미세먼지가 건강을 위협한다고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오죽하면 환경부에서 미세먼지 기준치를 올리는 방안까지 내놓았겠는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도 더 이상 답도 없는 환경 문제나 먹거리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데 염증을 느낀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어쩌라고!”다. 

이미 시스템에 잘 길들여져 편안히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이들 알레르기와 아토피, 자폐증’이 늘어나는 이유라든가 암 환자가 증가하고 당뇨, 고혈압, 콜레스테롤 환자가 늘어나는 이유가 먹거리와 환경 문제에 있다고 아무리 지적해봐야 그 누구도 고마워하지 않는다. 지금의 값싸고 편리한 먹거리, 안락한 생활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직접 소 키우고 농사지을 수도 없는데 “어쩌라고!”

출처=펙셀스
출처=펙셀스

현대 사회는 먹고사는 문제를 많이 해결했다. 한국이나 미국에선 굶어 죽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 다 식료품 생산 단가를 내릴 수 있었던 덕분이다. 직접 사냥하고 채집하고 작물을 키우지 않고, 스마트폰 게임하고 TV 보고 놀면서도 먹을 것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 가지곤 진짜 음식을 먹지 못한다. 사발면으로 한 끼 때울 순 있지만 매일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다. 어쨌거나 굶지 않고 배는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식료품 가격이 내려간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식자재 원가가 내려간 것과 유통기한을 효과적으로 늘릴 수 있었던 것, 장거리 운송이 가능해진 것 등등.
식자재 원가는 실제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식품첨가물로 대신함으로써 비용 절감이 가능해졌다. 실제 음식이 아닌 첨가물로 향을 내고, 맛을 내고, 식감을 더하고, 색상을 입힌다.

시간이 돈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발효 단계를 단숨에 뛰어넘는 화학품들이 마술을 부리고 방부제로 유통기한을 거의 무제한 늘릴 수 있게 되었다. 방부제가 문제 되자 음식에 효소를 제거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촌스럽게 방부제 사용하지 않고도 유통기한을 늘리는 일이 가능해졌다. 효소를 제거당한 음식은 발효도 되지 않고 썩지도 않기 때문이다. 물론 효소 없는 음식이 제대로 소화와 흡수가 될 리 없다.

아무튼 세상은 그렇게 바뀌었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 굶주림은 해소되었지만 대신 건강을 담보로 잡혀야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값싼 식료품을 제공해준 식품업계는 입바른 사람들의 지적이 못마땅하고 거슬렸다.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나고 요구 조건이 많아지면서 값싼 원료로 실컷 돈을 버는 데 제동이 걸렸다. 한마디로 좋은 시절이 다 지나간 셈이다.

그래서 ‘화학 기술’이 어느새 ‘과학’으로 둔갑했다. 계속 돈을 벌면서 이상 손가락질 받고 싶지 않은 식품업계는 태클 거는 사람들을 물리칠 묘안을 떠올린다. 바로 과학과 정치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돈이 많으니 어렵지 않았다. 과학자들에게 연구 과제를 내주고, 거액의 연구비를 지원하며, 유리한 논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정치인들에겐정치자금을 지원하며 규제 완화와 허가를 약속받았다.

슬금슬금 사카린이 다시 허가되었다. MSG가 억울하다고, 그동안 누명을 쓴 것이었으며 위험한 식품은 아니었다고 재조명받으면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최근 대한민국은 가습기 살균제 파동을 겪었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교훈은 도덕성이 결여된 기업은 반드시 소비자보다는 매출과 기업 이미지를 우선시한다는 것과, 도덕성이 결여된 학자라면 아무리 권위와 학력을 갖고 있더라도 기업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권력 앞에 한낱 부역자로 살아가는 지식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문제는 가치관이 말살된 경쟁 위주의 사회에선 이런 도덕성 결여가 너무 흔하다는 것이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같은 방법으로 GMO는 안전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GMO가 밥상 위의 가습기 살균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돈이 주인 노릇 하는 사회에서 사람을 위한 과학은 설 자리가 없다. 과학 신봉자들의 전체주의적 발상은 과학이 알려주는 것 외에 다른 의견이나 의심을 용납하지 않는다. 서슬 퍼런 사회 분위기는 조금만 조심하자고 얘기해도 건강염려증 환자로 내몰기 일쑤다. 그리고 비현실적 자연주의자로 내몰린다. 엄마 아빠의 입장에서 우려를 표명해도, 소비자로서 우려를 표명해도, 과학을 모르기 때문에 저런다는 콧대 높은 조롱이 돌아온다.

사람들의 건강 상태가 나날이 나빠져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공공의 건강보다 기업의 호주머니가 더 중요한, 정의롭지 못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의 유튜브 채널 ‘Dr. Joshua Cho’는 1000만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홈페이지 www.DrJoshuaCho.com
Drjoshuacho@alumni.usc.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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